SNUBIO16 [496355] · 쪽지

2015-05-02 20:12:52
조회수 1,672

좋아하는 시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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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현역 이과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를 뽑자면



내가 그다지 사랑하는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 이런 시



오르비언분들은 좋아하시는 시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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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의수의사 · 484941 · 15/05/02 20:30 · MS 2013

    추천사 이요 ㅋㅅㅋ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배갯모에 놓이듯 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뭔가 이상향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이 되게 인상 깊어서요.. ㅋㅅㅋ

  • 美學徒 · 423102 · 15/05/02 20:37 · MS 2012

    예-전에 저도 이런 글 올렸었는데 덕분에 좋은 시들 많이 추천받았죠. 저도 시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과생이어서...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괘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

    이상의 이런 시도 좋죠.. 이상 시의 그 모던한 느낌은 정말 따라할래야 따라할수가..

  • SNUBIO16 · 496355 · 15/05/02 20:42

    맞아요 이상 시들은 정말 ... 뭔가 묘하면서도 끌리는게 진짜....

  • 美學徒 · 423102 · 15/05/02 20:46 · MS 2012

    저도 아직 읽지는 않고 책장에만 모셔둔 책이 있는데, 태학사에서 나온 '이상 전집' 읽어보셔요.

  • SNUBIO16 · 496355 · 15/05/02 20:48

    오 감사합니다 꼭 찾아 볼게요

  • 펜텔샤프 · 515731 · 15/05/02 20:47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 구절 읽으면서 정말 좋았던거 같아요

  • SNUBIO16 · 496355 · 15/05/02 20:48

    그 구절 캘리그라피로 쓰여진 것도 많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오감도도 좋아합니다. 뭔가 독특해요

  • 美學徒 · 423102 · 15/05/02 20:49 · MS 2012

    날개는 그 부분도 좋지만 서문도 정말 오묘한 기분이 들게해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 뒤로도 뭐 어쩌구저쩌구하는데 그 문장의 배열 하나하나가.. (해석은 못하겠지만서도)

    또... 희망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이런 표현도 감탄이 나오구요.

  • SNUBIO16 · 496355 · 15/05/02 20:58

    확실히 이상은 문체부터가 신비롭습니다. 표현도 세련미가 넘쳐요.본인이 사모하던 여성분에게 쓴 연애편지도 있는데 이 역시 정말 마음에 듭니다...

  • 펜텔샤프 · 515731 · 15/05/02 20:53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천상병 시인인데요
    평생을 편안하게 사시지도 못했고
    사건에 휩쓸리면서 고생도 하셨는데(고문도 당했고요 ㅠㅜ)
    해맑게 웃으시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아련했어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도 들고

  • 美學徒 · 423102 · 15/05/02 20:56 · MS 2012

    아앙아 시 얘기 나오면 참지못해서 대댓글 괜히 계속 달게되네요.
    천상병 시인의 그 시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더라구요. 저두 좋아하고..

    천상병 공원이라는 곳이 있다는데, 그곳에 천상병 시인이 쓴 120여개의 시가 타임캡슐로 묻혀져있다고 하네요. 천상병 시인 탄생 200주년에 개봉할거라 120여년 뒤에나 볼수있다고 한다는..ㅜ

  • 펜텔샤프 · 515731 · 15/05/02 21:07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ㅋㅋㅋㅠㅜㅜ 120여년 뒤라니 ㅠㅜ

  • 은하수고양이 · 410770 · 15/05/02 20:56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은하수고양이 · 410770 · 15/05/02 20:57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신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 박노해 에서

  • asdf212 · 365265 · 15/05/02 20:58 · MS 2011

    장석남?시인의 배를매며인가 배를매고인가

  • 누눕 · 559940 · 15/05/02 21:09 · MS 2015

    전 최승호의 북어요~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하는 시인데 복붙해오긴 귀찮은ㅋㅋㅋ 중학생 때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어요 무미건조한 어투가 인상 깊어서 오래 기억에 남는 듯하네요

  • 봄비♥ · 503742 · 15/05/02 21:14 · MS 2014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김소월


    특히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 구절에서 울림이...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시인은 이상 시인이랑 윤동주 시인이요♥

  • ハローキティ · 474244 · 15/05/02 21:25 · MS 2013

    저는 정지용 향수요 ㅋㅋ

  • 빠니니 · 502281 · 15/05/02 21:29 · MS 2014

    현대시는 이과라서 잘 모르고 인터넷에 떠도는 일반인이 쓴 시에요

    빼빼로데이에
    빼빼로10개 사서
    얘도 주고 쟤도 주고 너도 줬어
    근데
    1개 주려고
    9개 더 산거
    너는 모르지??

    ㅋㅋ 오글거리면서 좋더라구요
    그리고 하상욱 시인 시도 좋아해요

  • 란타넘 · 560739 · 15/05/02 21:31 · MS 2018

    나희덕 푸른밤이랑 백석 여승이요
    여승은 이상하게 볼 때마다 울컥하네요... 모의고사에 나오면 문제풀다 또 울컥ㅎㅎ;

  • SNUBIO16 · 496355 · 15/05/02 21:46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우에도 몇 번 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이 시도 진짜 좋아합니다 ㅠㅠㅠㅠ

  • 은하수고양이 · 410770 · 15/05/02 21:52

    이거 자이스토리에 있는 그거...@

  • SNUBIO16 · 496355 · 15/05/02 21:58

    아 맞아요 ㅋㅋㅋ 저 이거 막 오려두고 그랬었는데...

  • 란타넘 · 560739 · 15/05/02 23:35 · MS 2018

    크으 이거죠ㅠㅜ 뒤늦게 생각났는데 한시중에 군상억도 좋아해요

    君相憶 (군상억:그대와 나 서로 생각하며  ) / 牧隱 李穡 이색
     
    憶君無所贈 (억군무소증) - 그대를 생각하며 무언가 주고 싶으나 줄 것이 없어

    贈次一片竹 (증차일편죽) _ 이제 한조각 대나무부채를 드리오니

    竹間生淸風 (죽간생청풍) - 대나무(부채) 사이에 맑은 바람 불거든

    風來君相憶 (풍래군상억) - 바람 따라 서로를 생각합시다.

  • d:-) · 512456 · 15/05/02 21:35

    선운사에서!

  • 공간적 · 568709 · 15/05/02 23:33 · MS 2015

    저는 기형도 시인 좋아해서 입속의 검은 잎 샀어요ㅋㅋ그거 길지도않은데 기형도 시 다들어있어서...질투는 나의 힘이랑 위험한 가계가 진심 항상마음을 울립니다..

    위험한 가계(家系) / 기형도]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지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리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선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바라기 씨앗 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서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 하하하 하하 · 515950 · 15/05/02 23:45 · MS 2014

    너는 말이다.
    한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 시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두 시간 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쓰잘 것 없는 호승심에 충동된 여덟 시간을 낭비하였다.
    물론,
    이 여덟 시간을 낭비하였다고 너의 인생이
    당당 망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것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미래에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 죽든
    아무것도 모르고 날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해서
    차라리 젊은 날에 독약을 마시든 하라.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中

  • SNUBIO16 · 496355 · 15/05/03 07:19

    이것도 시 인가요?? 저도 이 글 좋아해서 책상 앞에 붙어 있습니다 ㅠㅠ!!

  • 징징징징징징징징징 · 559452 · 15/05/03 00:07 · MS 2015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다시 만나랴

  • 고대경제로스쿨준비 · 564179 · 15/05/03 00:19 · MS 2015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 김빈 · 563415 · 15/05/03 00:28 · MS 2015

    인연설 2


    함께 영원할 수 없음을 슬퍼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음을 기뻐하고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치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나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한용운-

  • 파워문돌이 · 517146 · 15/05/03 02:11

    한용운의 반비례요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때 당신의 노랫가락이 역력히 들린다는 부분..정말 공감되더라구요ㅠ

  • 닥똥집 · 500233 · 15/10/18 21:11 · MS 2014

    저도 시 좋아하는 이과생인데 박노해의 요ㅠㅠ별덕후+제 좌우명이랑 매치되서ㅜㅜㅜ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 닥똥집 · 500233 · 15/10/18 21:16 · MS 2014

    ~해라,~이여 같은 문체 너무 좋아요ㅠㅠ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라든가 뭐랄까 내용은 안그런데 좀 로맨틱함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