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아지네요.
두서없는 글이 굉장히 길기까지 합니다.
저는 지방 일반고 이과 2등이었습니다.
꽤 할만한 성적이겠거니 싶었어요.
수시 6광탈을 맛봤습니다.
대체 왜 다 떨어졌을까도 생각했지만, 알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수능을 치러 갔습니다.
뭘 어떻게 봐도 백분위 98 이상이 나오던 국어는 2등급.
가채점이 96점이던 수학(가)는 2등급.
물리학 1은 48점으로 2등급.
평소 생각에, 좋은 대학의 이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우수한 학생들과 지내며 얻는 경쟁력, 기회
2. 내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으로 증명.
이 두 가지 이점이, 결국은 취업이라는 게임에서
결정적인 어드밴티지라고 느꼈습니다.
(컴공을 지망했습니다)
결국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 직장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 입시에 집착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수시도, 수능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느낌이었지
"여기 못 가면 재수"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오만 가지 미래 중
이렇게
개박살나는 미래는 없었거든요.
수시를 부담없이 상향으로 쓴 것도
모고 성적을 엄청나게 성장시켰고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말 '농어촌'스러운 지역이고 학교라,
많은 친구들이 수능을 도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역 입시에서 남길 수 있는 미련은 다 털었다고 느낍니다.
동네에 저보다 좋은 대학을 간 친구는 있어도
정량적인 실력 자체는 제가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애매하고 논란이 될 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해 밑줄을 치겠습니다. 이것에 대한 논쟁을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라고 봐주십쇼)
수시로 서울대를 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도
제가 알려주는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저외 그 친구가 느끼기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능에서 증명을 못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참담하지만, 이대로 있기에 제 인생은 너무 아깝습니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냥 대학을 다니던지, 재수를 하던지, 반수, 군대, 자격증, 프로그래밍 공부, 전공에 관련된 수학 공부, 영어, 알바.....
뭐 어쨌든 인생은 공부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이 선택지들을 조합을 하던, 순열을 돌리던 하겠습니다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감정적인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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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땅에 발을 딛고 처음 품었던 꿈은 바둑기사였습니다.
기억도 안나던 때에,
저는 책을 보고 바둑돌을 놓아보곤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둑을 배웠고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어른들을 꺾는 실력을 가졌습니다.
학원에서는 원장님과 바둑을 두고
집에 오면 바둑잡지를 보며 혼자 바둑을 뒀습니다.
얼마 뒤, 바둑기사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친척들의 극심한 반대를 받게 됩니다.
부모님도 제게 바둑을 업으로 삼지는 말라고 하셨구요.
물론 이해가 안되는 결정은 아닙니다.
제가 부모님이어도 불안한 마음을 가지긴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결과적으로 좋았건, 나빴건
초등학교를 다니던 저는
장래희망이라는 것에 무감각해졌습니다.
"하고 싶으면 뭐해요.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제가 담임선생님께 했던 말인것 같네요.
어른들, 혹은 동급생들에게 줄곧 들어왔던
'머리가 좋다'라는 부류의 말도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충분히 똑똑했다면, 내가 바둑기사를 할 수 있다는 증명이 어떻게든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타고나지 못한 나는,
그냥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등교를 준비하던 아침, 어머니가 그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이세돌이 무슨 기계랑 대결을 한다더라.
처음에는 아, 예, 그러고 말았습니다.
그쪽은 저랑 다른 세계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알 게 뭐람, 하고 넘겼던 거죠.
근데 어느 날 그냥 한 번 대국을 봐보고 싶더랍니다.
미련이었을지 뭐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한 번.
그 날 제 인생이 다시 뒤집혔습니다.
바둑에는 정석이 있습니다.
몇백 년간 인간이 쌓아올린 중심부 지식같은 겁니다.
조금씩 수정되고 개량될 뿐인, 그런 거였습니다.
근데 그게 처참히 깨지고 뭉개졌을 때
제가 느낀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다시 그 대국을 볼 때도,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하네요.
뭐 어쨌든, 저는 AI 개발자라는 막연한 꿈을 가졌습니다.
이게 세상을 바꿀 거라는 확신도 들었고, 제가 해내지 못하는 무언가를 정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합니다만 너무 길어질 것 같네요)
때려치고 싶었던 공부도,
동아리에서 하던 프로그램 개발도,
재미있었습니다. 이게 저에게 맞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제 앞에는 조각난 성적표가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 성적을 원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제가 개발자가 되는 길이 막힌 것도 아닙니다.
물론 대학으로 인생을 저울에 달아보는 것이
얼마나 성급한 일인지도 익히 들어 압니다.
앞으로의 일은 제가 하기 나름이니까요.
그러나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이 패배감이
10년 전처럼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요.
제가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가 되는 것은
얼마나 먼 일일까요.
사회에 발도 들이지 못한 학생이 겪는 아픔이 이정도라면
세상은 쉽지 않은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머리를 좀 식히고 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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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셨다면, 우선 푹 쉬시고 즐기세요. 즐거운 크리스마스니까요. 확실한 건 인생을 더 길고 넓게 보면 수능은 수험생들에게는 큰 산처럼 보이겠지만 그것보더 더 힘들고 짜증나는 산들이 많더라구요.
학업에 대한 큰 베이스가 있으니
한번 더 도전해보시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일단은 혼란스럼 마음을 다잡는 게 우선이구요 힘내시기 바랍니다
글 인상깊게 잘 읽었네요. 착잡한 기분이 드실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이실텐데 마음 잘 추수르시고, (개인적으로는 한번쯤은 더 해보시면 후회가 안 남으시지 않을까.. 싶긴 하네요) 후회하지 않을 결정 하시길 바랍니다.
덤으로 개인적으로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수능뿐만이 아닌 이후의 다양한 경험과 절차를 통해서라도 그 진가가 드러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혹여 입시에서 안 좋은 결과를 거두더라도 글쓴분의 경우가 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조금은 움츠러드는 시기를 인생에서 추구할 것에 대한 사색의 시기로 써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