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와 사림파
훈구파는 조선 초기 왕권을 수호한 신하들로 흔히 탐욕스런 기득권층이라 여겨지지만 실상은 다르다.
조선 500년은 훈구의 100년, 사림과의 전쟁 50년, 이후 사림의 250년, 무이념의 100년으로 볼 수 있는데
훈구파는 조선 기틀을 다지는 데 꽤 많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왕권을 절대적으로 수호했다는 점에서 신권을 중시한 사림과 달랐고
실리를 중시하며 명에게 복종하되 속으로는 민족주의적 정신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자기만의 무기를 고민하거나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황제유일주의인 명제국주의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처사다.
성종 때에는 법을 정립했고 요동 정벌 정책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다 부패했고, 사화 등으로 사림에 대한 인권탄압을 했으며 자기들끼리 부패하여 소멸했다.
애초 이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소멸이었다.
이를 이은 사림파는 도학정치를 이념으로 기득권은 대학, 피지배층은 소학을 읽어
농본국가를 세운다는 일념하에 정치했다. 신권을 강조했던 그들에게 왕 역시
교육대상이었고 부재하는 절대권력은 꽤 많은 반정 및 사화, 국난을 만들었다.
핵심 요직인 이조전랑을 둘러싸고 시작된 붕당정치는 처음엔 정치한 교조주의 기틀을 닦았으나
나중엔 이익을 겨냥한 난전이 됐고 그 사이 국격은 땅에 떨어졌다.
산업화와 국력신장이라는 명목하에 인권을 희생시키고 피에 올라 부를 이루었던 산업화세력은
자가부패하며 지금도 땅을 헤짚으며 정신과 민주주의, 평화를 무장한 세력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위험하다"는 원전을 포기하고 목가적인 자연, 바람에 의존하고자 하는 지금의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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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파와 훈구파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