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율문학단편선
•골(洞)•
- "2002년 5월 5일 금요일"
- 예?
- 오늘 어린이날이잖아, 애들 선물 사 가야지.
- 그렇기는 한데.. 팀장님 지금은 2027년인데요?
- 나한텐 2002년만이 어린이날이야. 그 날만이
나도 어린이일 수 있고 애들도 어린이일 수 있으니까.
- 무슨 말씀이신지..
- 특별하고도 끔찍한 일이 있었지.
- 2002년의 어린이날은 25년이나 지난 옛날인걸요. 아주 오래전의 그 해가 유달리 특별한 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하는 이례적인 일이 있었죠.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비즈니스 따위가 아니면 서로 인사조차 않던 이웃끼리 전부 밖으로 나와 시뻘건 옷을 입고 국가대표를 응원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 나는 함성의 2002년을 기억하고 싶은 게 아니야. 사람의 뇌엔 대개 즐겁고 행복한 기억보다는 고통스럽고 불행한 기억들이 더 자세히 각인되는 법이지, 자넨 2002년 월드컵 당시 예선 경기가 있는 날에 누가 골을 넣었고 누가 옐로 카드를 받았는지 자세히 기억하나?
- 예선 경기라..포르투갈을 상대했고 박지성이 골을 넣었던 그 경기 외엔 어느 나라를 상대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 그렇지, 아마도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때 예선에서 우리나라가 폴란드에겐 2-1로 승리했고 미국과는 1-1로 비겼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 할거야.
기분좋고 흥분되는 기억들은 부수적인 사항들을 수반하기 어려워. 그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 자체를 기억하기 때문일거야.
- "....일 거야" 요?
- 하지만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억들은 달라. 그 때 일어났던 모든 부수적인 사항들까지 낱낱이 기억하며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기억에 머물면서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남아 그를 죽을때까지 괴롭히거든. 예컨데, 노이로제라던가.. 그것도 사실 정신병의 일종이거든.
- 2002년 5월 5일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 .......
- 아, 꺼내기 힘든 기억이라면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 아니야,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미안하다. 방금 건 수형 씨 기억에서 지워 줘.
- 아..예.
- 그럼 이만 가 볼게. 아, 재무제표 엑셀 파일은 내 메일로 보내지 말고 일단 수형 씨 메일에 저장해 놔.
-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애들 선물 사가셔야 한다고..저도 그쪽에 볼일이 있는데 차라리 옥수역에서 환승하시고 저랑 같이 가시죠.
- 됐어. 거기서 넘어가면 한강이 보이잖아.
- ...예?
(1)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아 조졌다 기만 문학 쓰는 사람이 또 있다니